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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CTS
작성일시 : 2011-08-15
조회 : 1,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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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침탈과 36년간의 식민생활, 당시 믿음의 선조들은 신앙의 자유를 억압받고 고난과 박해를 감당해야했습니다. 독립운동에 헌신한 신앙선배들의 발자취와 광복절의 기독교적 의미를 살펴봅니다. 박새롬 기잡니다. -------------------------------------------- 일제강점기 일본은 기독교 말살정책을 펼쳤습니다. 구약성경을 유대민족운동사로 보고, 읽는 것을 금지시켰고 천황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기 위해 신사참배를 강요했습니다. 신앙을 왜곡하고 방해하는 가운데 1945년 광복은 출애굽과 같은 하나님의 구원역사였습니다. 김명구 상임연구원 / 한국교회사학연구원 당시 기독교는 민족운동의 정신적 주체였습니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인일 정도로 민족독립정신의 뿌리가 된 3.1운동의 시작과 확산을 이끌었습니다. 이는 교회, 학교, 병원 등 기독교 조직망이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김승태 연구위원/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3.1운동으로 19525명 수감됐는데 기독교인은 3426명이었습니다. 당시 전체 인구 1%도 안됐던 기독교인들이 17.6%의 지도자적 역량을 가진 거죠. 기독교는 또 전 세계에 한국을 상황을 알리는 통로가 됐습니다.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 박사는 3.1 만세운동 사진을 찍어 해외언론에 전달했으며 헐버트, 멕큔, 모우리 등 미국선교사들도 본국에 한국상황을 알리며 독립을 도왔습니다. 한편 미국에서는 한국독립을 돕기 위한 한국친우회가 미국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미국 전역에 결성됐습니다. 이들은 일본의 기독교 박해를 주목하고 식민통치의 실상을 미국의회 등에 알리며 친한여론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홍선표 책임연구위원/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친우회는 미국 21개 지역 프랑스 파리, 영국 런던까지 세계로 확산됐는데 다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전무후무하죠. 일제의 박해에 맞서 신앙과 민족을 지켜낸 기독교, 정의와 평화의 정신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앵커: 국내외로 한국독립을 위한 기독교의 역할이 컸는데요. 스튜디오에 나와있는 박새롬 기자와 더 얘기 나눠보겠습니다. 박 기자, 일제 강점기와 독립, 이 시기를 거치면서 한국의 기독교는 어떻게 변화했다고 보십니까? 기자: 네 역할이 컸던 만큼 민족 안의 영향력도 커졌습니다. 그 전엔 기독교가 외래종교라는 인식이 강했다면 민족독립에 앞장서고 박해를 받으며 민족종교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민족대표가 불리는 33명은 종교대표들인데요. 거기에 기독교가 포함돼 있다는 것은 더 이상 외래종교가 아닌 민족종교가 됐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습니다. ------------------------------------------ 앵커: 광복 이후 기독교는 더 발전했지만 어두운 이면도 있죠? 기자: 네, 광복 이후 한국교회가 반성해야 할 역사도 있습니다. 광복으로 신앙적 해방을 누렸지만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와 교회재건방법 등을 둘러싸고 심각한 갈등이 일어났는데요. 기독교는 고신, 기장, 예장 등으로 분열되기 시작했습니다. 고난과 핍박을 이겨내고 신앙을 지킨 이들의 전통을 잇는 것도 중요하지만 분열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입니다. 김명구 상임연구원/한국교회사학연구원 앵커: 이 역사가 주는 교훈과 과제는 무엇이라 보십니까? 기자: 민족의 해방을 위해 사명을 다한 민족교회의 전통을 잇는 것이 중요하겠죠. 또 분열보다 평화, 화합을 강조하며 이제 남북통일이라는 민족의 과제에 집중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듭니다. 앵커: 8.15 광복절을 맞아 기독교의 역할과 과제를 짚어봤습니다. 박새롬 기자, 수고하셨습니다. |